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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스포츠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남대문시장 일대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입력 2022.03.18 12:18 수정 2022.05.23 15:00

배우리
본지 논설위원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전)


남대문시장-칠패시장-창골(남창동-북창동)-상정승골(상동)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
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 오네
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
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
-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배오개와 종루 그리고 칠패는
도성 안의 유명한 3대 시장이라네다
온갖 공장(솜씨 좋은 장인)과 상인들이 많이도 모여들고
이문을 쫓는 만물화가 수레바퀴 돌듯 하네다
-정조 때 중신 박제가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家)



남대문시장은 조선 초부터 뜨내기 장사치들이 비정기적으로 모여든 허름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2년, 1726년, 세곡 수납소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번창하게 된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장들이 섰다. 시장다운 시장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정기적인 한양장시(漢陽場市)는 4곳으로.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배오개(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배오개시장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은 각각 오늘날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모태가 된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던 선혜청(宣惠廳)이 있었다. 관리들은 봉급표를 선혜청에서 쌀로 바꿨는데, 봉급 때에 쌀을 바꾸러 온 관리들을 상대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선혜청시장(센청시장)이 생겼다. 이를 창내장(倉內場)이라고 했고, 근처 마을은 창골(창동.倉洞)이라 했다. 창골이 두 마을로 갈리면서 지금의 북창동과 남창동이 되었다.
1950년대 말부터 남대문시장은 서양 물건을 많이 팔아 ‘양키시장’이라 했고,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지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옛날에 여러 마을들이 있었다.
시장 동쪽, 지금의 남대문로1가쯤엔 상정승골(상동=尙洞)이 있었다, 조선 인조 때 상진(尙震) 정승이 살았던 곳이다. 여기에는 지금 상동교회가 있다.
선혜청 근처의 창골(창동.倉洞)을 비롯하여 한국은행 부근의 솔고개(송현.松峴). 신세계 백화점 자리의 수각다리(수각교.水閣橋), 남대문 밖의 연못골(연지동.蓮池洞)이 시장 근처에 있었다. 남지(南池)라는 연못이 있어 나온 이름인 연못골은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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