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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스포츠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명례방골과 북고개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입력 2022.01.10 17:17 수정 2022.01.10 17:17

(명동) 명동성당-북고개-진고개-당핏골-모시전골


서울의 명동(明洞)은 조선 초 한성부의 5부(部) 49방(坊)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의 ‘명(明)’자를 딴 것으로, ‘명례방골’이던 것이 변한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명치정(明治町.메이지마치)’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명동(明洞)이 되었다.
명동은 조선시대에 종현(鐘峴)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이곳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던 종을 옮겨 달아 ‘북달재(북재)’라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종현’이 되었다.
명동은 조선시대는 주택지였으나, 일제 때 충무로 일대가 상업지역이 되면서 상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1885년 무렵부터 일인들은 남산 산기슭에 자리잡고 한국인을 상대로 거래를 하더니 청일전쟁 이후부터 그 입지를 굳혀 나갔다. 1894(고종31년) 청일전쟁으로 불리해진 청국 장사치들이 자취를 감추자, 기세가 올라간 일본 상인들이 진고개 일대에 일본식 가게들을 차리면서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 지역의 상가는 그 특성에 따라 크게 세 지역으로 분포된다. 종로 중심의 전통적인 한국인 시전가, 진고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일본인 상가, 소공동 일대의 청국인 상가.
일제 때의 명동은 다방, 카페, 주점 등으로 형성되어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 오락가였다. 그러나 정자실백화점(현재 영플라자 자리)이 생기고,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 10m도로가 새로 나면서 독자적인 상가를 형성하였다.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말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남대문로2가와 을지로2가의 금융업무 활동이 활발해져 금융가로 발달하였다. 그 후 1956년 말, 충무로가 쇼핑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명동이 새로운 쇼핑 중심지역으로 변화했고, 당시의 많은 주점들은 서린동, 청진동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1970년대는 젊음의 낭만이 넘쳐났던 사회 분위기에 여세를 몰아 통키타 시대가 도래했다. 60년대 중반의 ‘심지다방’을 시작으로 통키타의 원조를 자부했던 ’오비스캐빈’, ‘금수강산’을 비롯해 명동 통키타의 전성기를 장식한 ‘쉘부르’까지 지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며 ‘문화의 꽃’을 피웠다.
‘명동’ 하면 머리에 금방 떠올리는 것이 있다. 바로 명동성당이다.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북고개(종현, 鍾峴)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어 건립된 이 성당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45년 광복 후 종현성당(鐘峴聖堂)에서 명동성당(明洞聖堂)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동성당 근처로는 중심 마을인 명레방골을 비롯해 ‘종현’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 ‘북고개’가 있었다. 물감과 중국의 과일을 파는 ‘당핏골(당피동, 唐皮洞)’, 모시를 파는 ‘모시전골(저동, 苧洞)’도 있었고, 거기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진고개 신사’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진고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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