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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스포츠

【김창환 교수의 문화기행】우중미소(雨中微笑)ㅡ서산 마애삼존불 앞에서 만난 천오백 년의 깨달음

새용산신문 기자 입력 2026.08.22 15:52 수정 2026.08.22 16:18


김창환 본지 논설위원 / 공주대학교 행정학 박사 / 한국의정연수원 교수

처서(處暑)를 앞둔 날, 가야산 자락에는 종일 단비가 내렸다. 빗속에서 마주한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사진과 책에서 보아 온 그것과 달랐다. 구름과 빗줄기, 빛의 움직임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는 천오백 년의 미소 앞에서 삶의 근심을 내려놓고 중화(中和)의 지혜를 되새겨 본다.


처서17(處暑)를 앞둔 단비가 종일 내렸다. 주룩주룩,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우산을 접고 가야산 자락 인바위 앞에 섰다. 하필이면 비 오는 날 그곳에 가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그러나 막상 마애삼존불 앞에 서고 보니 알 것 같았다. 비가 내려야 비로소 보이는 미소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마애삼존불을 품은 거대한 바위는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천오백 년 전 석공은 자연의 형세를 읽고 그 바위에 부처의 얼굴을 새겼다. 앞으로 내민 바위 윗부분이 처마처럼 비를 가려 주어, 세 분의 부처는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한 자락 젖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세상은 온통 비에 젖는데 그분들은 젖지 않았다. 그 한 장면이 이날 내게는 말 없는 스승으로 다가왔다.

책에서 보던 미소와도, 사진 속에서 마주하던 미소와도 달랐다. 사진 속 미소는 한순간에 멈춰 있었지만, 바위 앞의 미소는 살아 움직였다. 구름이 지나가면 희미해지고, 빗발이 굵어지면 오히려 환해졌다. 빛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얼굴의 표정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 미소는 천오백 년 전 돌에 새겨진 채 멈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세 분이 한 바위에 나란히 계셨다. 가운데 여래는 오늘이고, 한쪽 보살은 지나온 날이며, 턱을 괴고 앉은 반가사유상은 아직 오지 않은 날처럼 보였다. 지난날과 오늘과 다가올 날이 한 바위에 새겨져 나란히 웃고 있었다.

지나온 날도 웃고 다가올 날도 웃는데, 나는 무엇을 그토록 무겁게 짊어지고 살아왔던가. 그 웃음은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아니었다.

얼굴 가득 크게 터뜨리는 웃음은 시원하지만 이내 사라진다. 그러나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소리 없이 오래 머무는 염화미소(拈華微笑)에 가까웠다.

世尊拈華 迦葉微笑
세존염화 가섭미소

세존께서 말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설명도 대답도 없었다. 그저 꽃 한 송이와 미소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참된 미소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지어 보이는 표정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을 깨달았을 때 저절로 번져 나오는 것이리라. 미소는 대답이 아니라 알아차림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는 자식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누구는 병상 곁에서 새벽을 맞는다. 또 누구는 벌여 놓은 일의 무게에 눌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삶의 굴곡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이 삶이라면, 세상 어디에서 근심 없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미소 앞에 서자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근심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樂天知命 故不憂
낙천지명 고불우

“하늘의 이치를 즐기고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근심하지 않는다.”
— 『주역』 「계사전」

發憤忘食 樂以忘憂
발분망식 낙이망우


“배움에 힘쓰느라 먹는 것조차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는다.”
— 『논어』 「술이편」

두 경전의 가르침은 근심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치를 깨닫고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근심을 잊는다고 했다.

근심은 억지로 없애려 할수록 오히려 커지는 법이다. 흙탕물을 맑게 하겠다며 손으로 계속 휘저으면 물은 더욱 흐려진다. 가만히 놓아두면 흙은 아래로 가라앉고 물은 스스로 맑아진다.

그날 마주한 미소가 바로 그러했다. 내 앞에 놓인 걱정을 대신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들끓던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주었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드러나더라도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 『중용』

마애삼존불의 얼굴이야말로 중화(中和)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웃음을 억지로 참은 것도 아니고, 소리 내어 터뜨린 것도 아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저 알맞은 만큼 은은히 번져 있다. 유학이 말하는 중화의 얼굴을 나는 그날 차가운 돌 위에서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위 추녀는 무엇으로 비를 막고 있었던가. 무엇을 더 얹거나 덧붙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앞으로 기울어 빗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비움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막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어 내고 마음을 기울여 흘려보내는 일이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추녀 하나 마련해 둔다면, 세상의 비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안쪽 어딘가에는 끝내 젖지 않는 한 자락이 남아 있지 않을까.

산을 내려오는 길에도 빗줄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미소를 바위에 두고 온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편에 한 조각 품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희망은 멀리 있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에도 웃을 수 있다는 것, 세상 모두가 젖는 순간에도 마음 깊은 곳에는 젖지 않는 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천오백 년 동안 한결같이 웃어 온 얼굴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대여, 오늘 그대의 얼굴에는 무엇이 번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얼굴로 세상과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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