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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수 교수 칼럼】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침묵하는 이유

새용산신문 기자 입력 2026.02.06 06:05 수정 2026.02.06 06:05

원광디지털대학교 김동수 교수


원광디지털대학교 김동수 교수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교인을 거느린 대형교회는 이미 순수한 종교 공동체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기능한다.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침묵을 선택할 유인은 더욱 커진다.

종교기관에 속한 학교법인, 병원, 각종 재단과 선교단체, 그리고 막대한 부동산과 재정 구조는 정부 인허가, 세제, 행정기관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 구조 속에서 교회의 발언은 곧 조직 전체의 리스크로 연결된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목회자가 입장을 밝히는 순간, 교인 간의 분열과 후원 감소라는 현실적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적 표적화나 세무·행정상의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결코 가볍지 않다. 결국 침묵은 신학적 판단이라기보다 조직 경영의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정교분리에 대한 오해도 여전히 반복된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헌법 제20조의 정교분리 원칙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정교분리란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후원하거나 지배·간섭하지 말라는 원칙이지, 종교인의 사회적·윤리적 발언을 금지하는 규정이 아니다.

목회자 역시 국민이며, 헌법 제2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가진다. 생명, 정의, 자유,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발언은 위법이 아니라 양심의 영역이다.

목회자는 부정부패, 폭력, 독재, 인권 침해와 같은 사회적 악에 대해 성경적·신앙적 관점에서 비판할 책임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성서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일부 목회자들은 정교분리를 침묵의 명분으로 삼거나 책임 회피의 논리로 사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권 비판에는 침묵하면서, 교회에 유리한 사안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선별적 침묵’이 반복되기도 한다.

대형교회일수록 교인의 정치 성향과 세대, 계층, 지역적 배경은 극도로 다양하다. 목회자가 사회 현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순간 “왜 설교에서 정치를 하느냐”,

“교회가 특정 진영 편을 든다”는 반발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일부 목회자들은 예언자적 사명보다 ‘교회의 안정적 유지’를 우선 가치로 판단한다.

또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정권 인사들과의 교류가 잦다. 각종 자문위원 위촉, 국가·지자체 행사 참여, 종교계 대표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 속에서 침묵은 관계 유지의 수단이 되고,

발언은 관계 단절의 위험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장 강하게 비판한 대상은 언제나 ‘권력 곁에 붙은 종교 지도자’였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 상당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이나 공적 정의보다는 개인의 영혼 구원, 심리적 위로, 성공과 회복,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 중립과 침묵은 다르다.

중립은 다양한 입장을 경청한 뒤 정의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지만, 침묵은 언제나 힘 있는 쪽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자유, 법치, 생명, 인권, 양심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종교의 침묵은 사실상 현상 유지에 대한 동조로 읽힌다.

다윗에게 직언한 나단, 왕을 꾸짖은 엘리야,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세례요한은 모두 불편한 진실을 말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교회가 세상보다 안전해질수록,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잃는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침묵은 신앙의 결핍이라기보다 규모와 권력, 조직 유지가 만들어낸 선택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약자가 아니라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은 이유는 단순히 세상이 타락해서가 아니다. 목회자의 성범죄, 횡령, 세습, 재정 불투명성 앞에서 교회는 회개보다 방어를 먼저 선택했고, 내부 징계보다 은폐와 침묵을 택해왔다.

이 순간 교회는 스스로 도덕적 심판자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설교에서는 정의와 희생, 약자 보호를 말하면서 현실에서는 권력 편승과 선택적 침묵이 반복될 때,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어떤 외부 비판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진다.

담임목사의 절대 권력, 견제 없는 장기 집권, 가족 중심의 승계로 이어지는 ‘제왕적 목회’ 구조 역시 문제의 핵심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 노동자, 민주화의 현장, 사회적 약자와 함께했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 성장과 숫자가 신앙의 척도가 되면서 교회는 고통의 현장보다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한국교회가 신뢰를 잃은 이유는 세상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기준을 낮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분명히 존재한다. 작지만 정직한 교회, 침묵하지 않는 목회자, 권력과 거리를 두는 신앙인, 숫자보다 진실을 선택하는 공동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조용할 뿐이다. 신뢰는 홍보로 회복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한 선택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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