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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규 김포문화원장 / 본지 논설위원 |
민속씨름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의 혼이 담긴 전통문화이며, 단오절 씨름판은 공동체 정신이 살아 숨 쉬던 생활문화의 상징이었다.
씨름판은 힘의 겨룸이면서 동시에 예(禮)의 공간이었고, 경쟁의 장이면서도 존중의 무대였다.
서구 음식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어느 순간 된장, 고추장, 김치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씨름 또한 그렇다.
씨름은 단순히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몸의 중심을 지키며 상대의 중심을 공정하게 무너뜨리는 정신의 수련이다.
그래서 씨름에는 자연스럽게 ‘예’가 스며 있다. 야유와 모욕, 비하의 언어는 씨름판의 정신이 아니다.
진정한 씨름은 규칙 안에서, 수평적 관계 속에서, “상대가 곧 나 자신”이라는 인식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정당당한 승부다. 이것이 전통이 가르쳐 준 품격이다.
이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이만기 천하장사였다. 한라장사 7회, 백두장사 17회, 천하장사 10회, 345전 293승 52패, 승률 85%, 기록만으로도 그는 하나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를 진짜 위대하게 만든 것은 성적이 아니라 태도였다. 그의 씨름철학은 역칠기삼(力七技三) — 힘이 일곱, 기술이 셋. 체력이 먼저이고, 기술은 그 위에 쌓이는 것이며, 그 둘을 지탱하는 것은 정신력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의 실천이었다. 씨름판에서 받은 상금의 절반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씨름계에 환원했다. 개인의 영광을 공동체의 자산으로 돌리는 품격, 이것이 진짜 스포츠맨의 윤리였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정치판과 겹쳐진다. 정치판에서도 급여와 수당, 후원금과 정치자금을 절반쯤 사회에 환원하는 ‘금뱃지 정치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스포츠맨과 정치맨, 누가 더 애국애족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윤리 기준을 묻는 질문이다.
씨름판의 진리는 또 하나 있다. 강자는 영원하지 않으며, 새로운 강자는 언제든 등장한다.
이만기 앞에 등장한 강호동은 무명의 신인이었다. 이만기의 방심 속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모래판은 냉정했다.
씨름판은 오만을 용서하지 않는다. 강호동은 바람처럼 등장해 바람처럼 떠났고, 이후 전혀 다른 길에서 새로운 인생을 열었다.
이만기는 씨름판을 떠나 학자의 길을 택했고, 정치개혁의 꿈을 안고 정치판에 도전했으나 또 다른 현실 앞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정치판은 씨름판이 아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패배의 조롱이 아니라, 영역의 본질이 다르다는 냉혹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 역시 실패가 아니라 삶의 철학을 확장한 과정이었다. 그는 결국 체육학자로, 교육자로, 방송인으로 자기 길을 걸으며 또 다른 형태의 공공성을 실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승패가 아니라 태도다. 우리는 오랫동안 타인을 비하하는 언어에 익숙했다.
조롱과 멸칭, 평가절하의 문화 속에서 자존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세계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비방의 언어에서 존중의 언어로, 야유의 문화에서 품격의 문화로, 모래판의 오만에서 중심의 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방식이 진짜 경쟁이다.
씨름판의 중심은 몸의 중심이었지만, 지금 시대의 중심은 정신의 중심이다. 정의는 더디게 가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부정은 요란하나 끝내 오래 머물지 못한다.
힘겨워도 희망을 열정으로 지피며, 중심을 지키는 삶으로,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길 — 그것이 정석이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말처럼 힘차게 달리되 중심을 잃지 말고,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되 자신을 태우지 말며, 중심을 지켜 흔들림 없는 한 해를 살아가기를 바란다.
정의는 끝내 부정을 이기고, 품격은 마침내 소란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