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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두문동(杜門洞)의 문을 다시 두드리며—72현의 충절을 기리다

새용산신문 기자 입력 2025.07.19 21:18 수정 2025.07.19 21:18


김동영 본지 발행인

【발행인 칼럼】두문동(杜門洞)의 문을 다시 두드리며—72현의 충절을 기리다

조선이 열릴 때, 고려는 닫혔다. 그러나 그 닫힌 문 안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충절(忠節)의 불빛, 지조(志操)의 횃불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 불꽃의 흔적을 따라 경기도 개풍, 광덕산 자락의 ‘두문동(杜門洞)’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두문동은 단순한 은둔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러진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문을 닫은 선비들의 결연한 결단의 상징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권력이 새 주인을 찾을 때, 그 물결 앞에 고개를 들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정몽주, 이색, 조의생, 임선미, 성사제 등. 이름 하나하나가 충절의 기둥이 되었고, 지조의 울림이 되었다.

그들은 세상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벼슬을 마다하고 권세를 외면하며 문을 닫았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이들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시대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을 향한 도전이었다. 몸을 낮추어 지조를 높인 삶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오히려 사표가 되었고, 정조 임금은 1783년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정신을 기렸다.

그 가운데 한 사람,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선생의 생애는 이 고결한 정신의 응축이라 할 만하다.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정을 절명시(絶命詩)로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단지 순국(殉國)의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혼탁한 권세의 시대를 향한 침묵의 고함이자, 명분에 순종한 마지막 충언(忠言)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오래된 비문 속에서만 잠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가까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진실한 삶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두문동(杜門洞)의 문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 문은 나무로 된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양심의 문턱이었고 신념(信念)의 담장이었다.

오늘 우리는 타협과 실리를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두문동의 정신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역사는 단순히 앞으로만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다. 잊힌 가치를 다시 불러내야 할 때, 뒤를 돌아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일지도 모른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와 두문동 72현(杜門洞 72賢)이 남긴 것은 단지 고고한 절의(節義)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성찰의 유산이다.

그들의 침묵은 시대를 향한 가장 강한 목소리였고, 오늘의 우리에게 ‘정신적 중심’을 되묻는 살아 있는 질문이다.

그 문은 닫혀 있었지만, 결코 닫힌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 속의 대화였고, 고통 속의 지조(志操)였다.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고요한 결단이 다시 울림으로 살아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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