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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수 논설위원 |
도시의 품격은 하늘을 찌르는 빌딩의 높이나 사통팔달 뻗은 도로의 넓이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땅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숨결과 세대를 이어온 풍속, 삶의 애환이 깃든 음식과 예술,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가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 도시만의 고유한 품격이 완성된다.
향토문화는 박물관에 가두어 둘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의 삶에 깊이를 더하고 내일의 번영을 일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역의 정신적 자산이자 미래의 성장 동력이다.
세계의 여러 도시는 이미 이러한 문화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일본의 가나자와(金澤)는 오랜 전통 공예에 현대적 디자인과 창의성을 접목해 세계인이 찾는 문화도시로 성장했다.
스페인의 빌바오는 쇠퇴한 산업도시에 문화예술이라는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로 거듭났다. 두 도시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도시의 미래는 외부의 화려한 것을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역사와 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전국 방방곡곡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삶이 응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제대로 발굴하지 못한 채 세월 속에 묻혀가거나,
보존과 활용의 체계적인 정책이 부족해 소중한 자산이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화유산을 미래의 성장 기반으로 연결하기보다 과거의 흔적으로만 바라보는 인식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향토문화는 지켜야 할 과거인 동시에 개척해야 할 미래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창조적 자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향토문화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유산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택과 유적, 전통시장과 공예품이 유형의 자산이라면, 설화와 민요, 방언과 세시풍속, 이웃과 더불어 살아온 공동체 정신은 무형의 자산이다.
이 모두가 한 고장의 역사와 정체성을 이루는 소중한 문화적 뿌리다. 유형과 무형의 유산이 조화를 이룰 때 지역은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특색 있는 관광자원이 탄생하며,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유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전통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미래의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시민의 일상과 문화예술, 교육과 관광, 지역산업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문화는 보존될 때 역사가 되지만, 삶 속에서 향유되고 계승될 때 미래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역문화 정책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발굴하기보다 단기적인 관광객 유치와 축제의 외형적 성과에 치중한다.
지역마다 비슷한 행사와 관광상품이 되풀이되고, 정작 그 고장만의 역사와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광정책, 지역산업 육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문화정책의 지속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장기적인 비전보다 단체장의 임기나 일회성 예산에 좌우되는 사업은 지역문화의 뿌리를 깊게 내리기 어렵다.
지역의 주인인 주민들이 문화정책의 수립과 실행 과정에서 소외된다면, 아무리 화려한 문화시설과 축제를 마련하더라도 그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역문화의 진정한 주인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주민이 자신의 고장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지키고 가꾸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향토문화는 비로소 살아 있는 공동체의 자산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지역의 역사와 인물, 유적과 전통, 생활문화와 자연환경, 산업화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있는 문화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해야 한다.
사라져가는 옛이야기와 풍속, 장인의 기술과 어르신들의 기억까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발굴해야 한다. 오늘 기록하지 못한 역사는 내일 복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굴한 자원 가운데 지역을 상징하는 핵심 문화유산을 선정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문화콘텐츠로 발전시켜야 한다. 역사적 인물의 삶은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오래된 골목과 전통시장은 이야기가 흐르는 문화공간으로,
향토음식과 전통공예는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문화유산과 지역산업이 만나고, 전통과 현대적 창의성이 조화를 이룰 때 지역경제에도 새로운 활로가 열린다.
이를 위해 지방자치단체는 일관성 있는 중장기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문화기관과 학교, 지역기업과 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지역신문은 향토문화의 가치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공적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잊혀가는 인물과 역사, 이름 없이 전통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지역언론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시대적 책무다.
아울러 문화정책의 성과를 단순히 축제 방문객 수나 행사 규모로 평가하는 관행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지역 주민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청년들에게 어떤 기회가 마련되었는지,
지역경제에 얼마나 지속적인 활력이 생겨났는지를 살펴야 한다. 문화의 궁극적인 가치는 보여주기 위한 성과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방도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청년 유출과 지역경제 침체라는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더욱 소중하다.
산업과 자본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빚어낸 역사와 문화, 그 땅에 스며든 공동체의 기억은 쉽게 복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향토문화의 경쟁력이 있다. 남들이 가진 것을 뒤따라가는 도시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신만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도시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새로 세우느냐가 아니라, 이미 지닌 소중한 가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향토문화운동도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품어야 한다.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전통적인 역할을 넘어, 고향의 역사에서 미래의 비전을 발견하고 이를 시민의 행복과 지역의 번영으로 연결하는 실천적 문화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화는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다음 시대를 여는 문이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오늘의 지혜로 되살리고, 그 가치를 후손들의 삶 속에 이어주는 일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다.
세계는 지금 문화로 도시를 일으키고, 고유한 역사와 이야기로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우리 역시 더 늦기 전에 고향의 문화적 뿌리를 돌아보고, 그 속에 잠든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듯,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깊은 도시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고향의 문화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어제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을 풍요롭게 하고 내일의 희망을 일구는 일이다.
문화가 살아야 고향이 살고, 고향이 살아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