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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제92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거행

김준태 기자 입력 2024.10.13 21:53 수정 2024.10.13 22:37


'제92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안내 현수막 / 사진_김준태 기자


제92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 화환 / 사진_김준태 기자


정수용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이 식사(式辭)를 하고 있다. / 사진_김준태 기자

지난 10월 10일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전에서 '제92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전종호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유공단체장, 광복회 서울지부 각 구 지회장 등 보훈 관련 인사와 일반시민 등 약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홍인근 이사의 약사보고에 이어 정수용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의 식사(式辭), 전종호 서울지방보훈청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봉창 의사(1901.08.01~1932.10.10)는 서울 용산에서 출생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1931년 1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우고, 약 1년 동안 거사 준비를 마치고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에 입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으나, 폭약이 약해 안타깝게 실패했다.


그날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같은 해 9월 동경 대심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동경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일본애서 국내로 봉환되어, 7월 6일 국민장을 거행하고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렸음은 물론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대상으로 의거를 거행해 장제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는 등 침체일로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 큰 활력소가 됐다.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루쉰공원)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62년 우리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최고 건국공로훈장인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해 현재 많은 뜻있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늦게라고 훈격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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